그림자 자국 상세보기

출간된지 1년이 넘었는데 출간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워낙 오래전에 읽어서 드래곤 라자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도 안나는데 드래곤 라자의 후편이라고 하니 좀 걱정이 되었으나 이 책은 드래곤 라자와 별개의 독립적 작품으로 간주해도 무리는 없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예언자이다. 천 년에 한 명 나올만한 뛰어난 예언자인 그는 예언은 폭력이라고 믿고 (원치 않게 읽으려던 소설의 결말을 알게 되어버렸을 때를 생각해보라.) 예언하기를 거부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필코 숨겨야 할 비밀이 있는 드래곤들은 그가 예언하는 것을 막으려하고 전쟁에서 패한 바이서스 왕국의 왕비는 그의 예언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예언자는 결국 예언을 하고 드래곤들이 숨기려했던 비밀은 드러난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진다.

예언은 얼핏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정해진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예언은 결국 실현된다. 이러한 고대 신화적 주제를 이영도는 이 책에서 풀어낸다. 그리스 신화에서 무수히 증명되었듯 이 책에서도 인간은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 이들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오히려 의도와는 반대로 차근차근 예언을 실현해나갈 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모든 것은 결정된 것인가. 우리는 그저 운명의 꼭두각시일 뿐인가. 왕지네는 묻는다. "피할 수 없었어? 바꿀 수 없었어? 모든 건 다 결정되어 있는 거야?" 그 질문에 대해 예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왕비는 왕의 죽음 때문에 슬퍼서 죽은 것이 아니야. 시간의 장인들은 통속적이야.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지. 그건 가지치기인지도 몰라. 적당히 솎아주지 않으면 과일이 너무 많이 열려서 나무에 해가 가지." 모든 디테일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시간의 장인'들이 큰 이야기 흐름에만 관심 있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가지치기 정도 수준의 관심만 가지고 있다면, 순간순간의 인간의 선택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예언자와 달리 인간은 미래를 모른다. 이루릴은 말한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에요. 펫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루릴은 선택한다. '어느 쪽을?' 왕비를 막기보다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아일페사스를 구하는 쪽을.

존재를 지워버리는 그림자 지우개의 위력은 가공할만하지만 그림자 지우개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할 것 같다. 프로타이스가 돌아오려고 하는 바람에 그림자 지우개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그 때마다 다른 사건이 전개된다. 한 존재의 유무는 무의미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든 '시간의 장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예언과 왕자는 남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어떤 존재의 유무에 따라 이야기의 진행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미래는 여전히 오픈북인 셈이다.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바꿀 수 없었던 예언자지만 그도 '시간의 장인'들이 안배해놓은 것, 예언과 왕자, 이외에 한가지를 더 남겨두고 사라진다. 존재는 사라지지만 그의 부탁은 남고 인간은 드래곤 레이디가 정해놓은 무시무시한 운명을 비켜나갈 수 있게 된다. 이 결말은 꽤 감동적이었다.

인터넷에서 이 책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황금가지에서 편집과정에서 삭제한 부분을 공개해 놓았다. (여기) 전체적으로는 삭제한 것이 나은데 어떤 부분은 삭제하지 않았으면 이야기가 더 명료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었다. (평행우주를 만들어버리는 그림자 지우개 덕택에 후반부의 이야기는 잘 따라가지 않으면 꽤 혼란스럽다.) 이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책 앞부분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일러두기를 유념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이영도의 글솜씨는 원숙해지고 그래서 독자는 그저 즐겁고 행복할 따름이다.

(오랜만에 이영도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2009년도에 나온 에소릴의 드래곤이라는 단편 소설도 발견했는데 경쾌하고 발랄한게 그의 작품답다.)

Posted by Adella

블로그 이미지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Adella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