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2. 11:36 책/논픽션
Edward Lazarus, Closed Chambers: The Rise, Fall, and Future of the Modern Supreme Court (1999)
종종 5-4 판결로 드러나는 미국 연방 대법원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세밀하게 묘사한 책. 10년 전에 출판된 책이지만 지금의 대법원의 모습과 당시 대법원의 모습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미국 연방 대법원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대법관 블랙먼의 로 클럭 (law clerk)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삼고 오랜 리서치와 대법원 로 클럭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대법원 내부 사정을 샅샅이 드러낸다.
이 책을 처음 읽게 된건 대법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서였고 저자가 어떤 성향과 시각으로 이 책을 서술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그랬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이 책은 리버럴 성향의 로 클럭이 보수적인 성향으로 점차 탈바꿈해나간 대법원의 모습을 고통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그래서 읽는 나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저자가 서술한 시기의 중요한 판결은 많겠지만 그는 크게 두 가지 분야메만 집중을 한다: 바로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이다. 둘 다 워낙 센세이셔널한 주제이고 많은 경우 단순한 법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와 연결되다 보니 양쪽 모두 격렬해지기 쉽상이다. (Roe v. Wade 판결이 내려진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포기 못하는 낙태 반대론자들을 봐라. 이 자들이 자신들을 노예제 폐지론자과 동일시한다는데에는 아주 기가 막혔다.)
한 때 리버럴은 이 두 분야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사형제도는 한 때 위헌 판결이 났고 Roe v. Wade는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점차 보수화하는 대법원의 성향에 따라 점점 의미를 잃어가게 된다.
저자는 사형제도 폐지론자인데 이 분야에서 리버럴이 패배하게 된 원인을 분명하게 공격적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추구했던 단체에 돌리고 있다. 사형제도가 위헌이 아닌 것으로 대법원이 다시 판결을 내린 후 폐지론자 변호사들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될 수 없도록 온갖 법률적 수단들을 동원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전략이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을 매우 화나게 만들었고 이 대법관들은 폐지론자 변호사들이 법률 시스템을 악용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폐지론자들이 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아젠다를 추구하는만큼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도 공격적으로 이들의 노력을 막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이들이 보호하려고 했던 이들의 권리가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폐지론자들의 아젠다에는 동조하나 이들이 전략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본다.
저자는 또한 Roe v. Wade를 둘러싼 대법원 내부의 갈등을 통해 대법원 내부의 모습을 드러낸다. 랭퀴스트 대법관과 다른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은 끊임없이 Roe v. Wade를 뒤집을 기회를 모색했는데 다행히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 이후의 케이스들에서 반낙태 성향의 법안들이 줄줄이 합헌 판결을 받았지만 저자가 숨가쁘게 묘사하는 Roe v. Wade를 둘러싼 내부 알력 다툼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Roe v. Wade가 뒤집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리버럴 성향의 저자는 당연히 이러한 보수 세력의 움직임에 분노하지만 대법원을 리버럴 성향의 아젠다를 추구하기 위한 장으로 삼아버린 리버럴의 전략에 큰 의구심을 표시한다. 법원은 다른 권력 기관과 달리 엄격한 논리로 무장해야 하는 기관이다.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공격당할 수 있는 논리에 기반한 '올바른' 판결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 그가 보기에 사형 제도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판결의 논리도 그 기반이 취약했고 Roe v. Wade의 판결 역시 그러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기반해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은 논리적으로 비약이었고 그렇게 빈약한 논리에 기반한 덕에 낙태권은 끊임없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낙태권은 Roe v. Wade에서처럼 프라이버시에 기반할 것이 아니라 평등권을 근거로 성립되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한다. 나도 역시 동의한다. 솔직히 Roe v. Wade 판결문 읽을 때 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그렇게 터무니 없는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 책은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이 중요한 법적 이슈에서 하나씩 승리를 거두어나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묘사하고 있어서 리버럴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좀 괴로운 책읽기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수적 성향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즐거운 승리의 기록이냐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기본적으로 그가 그리는 리버럴 성향의 판사들은 결점을 가진 인간적인 인물들이지만 (특히 그가 자신의 보스인 블랙먼 판사를 묘사하는 구절들은 진한 애정이 배여 있다) 그는 보수적 성향의 판사들은 사악하고 부정직한 천재, 모사꾼들로 묘사한다. 위키피디아를 보니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코진스키 판사 (9th Circuit의 아주 유명한 보수적인 판사)가 이 책에 대해 편파적이라고 비판했다고 하는데 그럴만도 하다. 하드코어 보수적 성향의 판사들 (랭퀴스트나 스칼리아 같은) 뿐 아니라 대충 중간쯤에 있다고 간주되는 오코너나 케네디 역시 그의 부정적 묘사를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자신들의 보스에게 보수적인 아젠다를 강력하게 밀어부친 로 클럭들 역시 아주 사악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 책 읽으면서, 이 저자 정말 용감한데?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 묘사가 공정했든 편파적이었든 나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대법관들에 대해 읽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덕택에 그저 진보적 판사들이라고 내가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판사들을 좀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현 대법관 중에서는 수터 대법관에 대한 호감도 급상승. 스칼리아에 대한 견해는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엄청 똑똑해서 더 밉지만 존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는 그의 견해를 읽을 때마다 진짜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 읽고 나서 평가가 더 하락했다. 케네디에 대해서는, 오코너 은퇴 이후로 항상 케이스를 결정하는 인물이라는 것 이 외에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보수적인 인물이지만 자신의 평판에 대해 예민하다는 저자의 평가는 조금 안도감을 준다. 평판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제일 똑똑해 같은 스칼리아가 보수 진영에 한 명 더 있으면 좀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또 다른 하드코어 보수 성향의 로버트 보크가 대법관에 임명되지 않고 케네디가 임명된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칼리아가 두 명 있다고 생각하면. 윽. 상상도 하기 싫다. 현 대법원장 로버츠나 알리토 대법관은 스칼리아 같은 인물은 아닌 것 같으니.)
어쨌든 좀 고통스럽긴 했지만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었다. 미국 대법원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책이 아닐까 싶다. 리버럴의 시각에서 쓰여졌고 견해에 따라서 인물평이 그다지 공정하지 않다는 평을 들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아주 균형잡히게 잘 쓰여진 책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