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8. 12:06 책/논픽션
David J. Garrow, Liberty & Sexuality: The Right to Privacy and the Making of Roe v. Wade (1998)
'자유와 성'이라는 제법 딱딱한 제목이 붙여진 책이지만 이 책은 Roe v. Wade의 기원부터 Roe v. Wade의 이후까지의 모습들을 흥미롭고 세세하게 추적해나가는 역사책이다.
Roe v. Wade에 대해 이야기할 때 Griswold 케이스를 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Roe v. Wade의 프라이버시의 권리는 Griswold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Roe v. Wade를 공부할 때 Griswold 케이스를 알게 되기야 했지만 Griswold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해서 이 케이스가 대법원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Griswold는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한 커네티컷 법안이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케이스이다. 피임기구 사용 금지라니, 어쩐지 한 세기 전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Griswold 판결은 1960년대에 내려졌다. 그 이전까지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하는 커네티컷 법안은 엄연히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커네티컷의 여성들이 피임을 하지 않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이 책은 서술하고 있다. 특히 주치의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은 이미 주치의를 통해 피임기구를 처방받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인해 저소득층 여성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저렴한 클리닉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피임할 권리를 옹호하는 Planned Parenthood 커네티컷 지부는 무려 몇 십 년 동안 열심히 이 법안을 폐기시키기 위해 의회 로비 활동을 벌이지만 피임이 자연법에 위반된다는 입장 하에 강력하게 이 법안의 지지 로비 활동을 벌인 카톨릭 교회 덕택에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계속된 실패로 완전히 침체된 이 운동에 새로운 리더로 등장한 것이 바로 Estelle Griswold이다. Planned Parenthood는 몇 번 법원을 통해 이 법안을 무력화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보수적인 주 대법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Griswold 케이스 이전에 연방 대법원까지 도달한 케이스들은 기술적인 문제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문제란 이 법안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실제로 집행되는 일은 드물어서 이 법안에 이의를 제기한 원고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판결이 연거푸 내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Griswold는 자신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결국 성공을 한다. 그녀의 케이스는 결국 대법원에 도달하고 대법원은 진작 폐기되었어야 할 오래된 이 법안에 위헌 판결을 내린다. Roe v. Wade를 위한 초석이 세워진 것이다.
이 책 이전에 읽은 Closed Chamber의 저자는 Roe v. Wade 판결이 성급한 감이 있었고 더 합리적인 법 논리가 개발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을 통해 Roe v. Wade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에 미국의 많은 주에서 낙태를 완전히 금지하고 범죄로 만드는 법안들이 만들어지고 1960년대까지 이 법안들은 대부분의 주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낙태시술을 원하는 여성들은 비밀리에 낙태시술을 하는 의사 (혹은 의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시술을 받아야 했고 더 월이라는 영화에서도 잘 보여주는 것처럼 불법 낙태시술로 인해 여성들은 빈번하게 목숨을 잃었다. 60년대부터 완전히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수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60년대 후반에 힘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임신한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한 경우,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희생자인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하여야 한다는 식의 수정 법안들이 옹호되기 시작했고 낙태권 활동가들 덕택에 (또 다시) 카톨릭 교회의 반대를 넘어서 몇몇 주에서는 통과되기도 했으나 조만간 낙태권 옹호자들은 수정 법안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곧 폐지론으로 견해를 바꾼다. 낙태권 옹호자들이 폐지론으로 견해를 옮겨가면서 카톨릭 교회의 반대도 점점 거세진다. 몇몇 주에서 낙태금지법안을 폐지하는 법안들이 성공적으로 통과되지만 반대세력의 캠페인도 점점 강화되어 Roe v. Wade의 판결이 내려질 무렵에는 여러 주에서 낙태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Roe v. Wade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Roe v. Wade 그 이후를 다루고 있는데 소위 pro-life 세력들이 벌이는 일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혐오감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는 Roe v. Wade에 대해 명료하게 반대 입장을 취했고 여러 차례 Roe v. Wade를 뒤집으려는 노력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병원들에게는 낙태 관련 조언을 하지 말라는 규정들을 만들기도 했고 (그리고 대법원은 이런 규정이 합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합헌 판결을 내린 판결문에도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결국 다른 병원 가면 되지 않느냐는 건데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자유롭게 다른 주나 다른 병원으로 갈 경제적 능력이 안되는 저소득층 여성들에게만 불공평하게 짐을 안기는 것 밖에 더 되나. 거기다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들을 살해하고 낙태 클리닉 직원들과 낙태 클리닉을 찾아가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일을 저지른 자들이 전 KKK 회원들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할 말을 잃고. 사실 난 pro-life 세력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들인가 좀 궁금했는데 이 책에 인용된 어떤 학자에 따르면 pro-life 활동가들 대부분이 적당히 고등교육을 받고 가정 밖에서 직장을 가져보지 않은 결혼한 여성들이다. 그 학자에 따르면 이들 활동가들은 진심으로 태아의 생명을 염려한다기보다는 피임, 낙태가 상징하는 자유로운 성생활과 비전통적인 문화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낙태 반대라는 이슈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낙태가 영아 살해랑 똑같다고 생각하는 하드 코어 크리스챤들이 여기에 추가될 것이다. (겹치는 부류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94년에 출판되었고 이후 개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읽은 책은 94년 출판된 책이다. 아마 이 책에서 다룬 Casey 이후의 연방 대법원 판결들도 다루고 그 이후의 상황들을 추가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Casey 이후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는 알고 있기도 하고 그 이후의 대법원 판결들은 우울할 뿐이니 그다지 읽고 싶지는 않다.
무려 7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이 책의 주제를 조사한 끝에 이 책을 출판하였다고 하는데 그 세월이 충분히 이해될만큼 이 책은 세세하게 피임부터 낙태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 개입한 사람들과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이슈와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격동적인 역사를 거쳐온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운동들도 이러한 역사가의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조명을 받았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책을 읽을 필요성도 함께.
미국의 피임 & 낙태 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저자가 쓴 책 중에 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인 Bearing the Cross라는 책도 있다고 하는데 이 책도 앞으로 읽을 책의 목록에 올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