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석한 논리로 미국의 시장주의와 민주주의 동시 수출이 어떤 참담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를 논증하는 책이다. 원제는 World on Fire: How Exporting Free Market Democracy Breeds Ethnic Hatred and Global Instability이고 저자는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이다.

저자의 책은 그녀의 개인적 경험담으로 시작하는데 그녀는 중국계로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이민왔고 그녀의 친척들은 여전히 필리핀에서 살고 있다. 호화로운 주택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그녀의 친척은 오랫동안 일해왔던 필리핀인 운전자에게 어느날 살해당한다. 그것은 단순히 도둑질을 위한 것이 아닌 오랫동안 쌓여온 모욕감이 분출한 증오범죄였다. 그녀는 이 비극적인 가족사를 시장점유 소수집단이 어떻게 현지의 가난한 다수의 증오를 사는지에 대한 실례로 보여준다. 시장점유 소수집단이란 대다수 국민들과 민족/인종이 다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집단을 가리킨다. 필리핀에서 중국인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이 책에 따르면 세계에는 시장점유 소수집단이 있는 국가들이 매우 많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 아프리카의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는 시장주의와 민주주의가 수출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시장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이런 나라들에 수출되면? 결과는 파국이다. 저자는 다양한 국가들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시장주의와 민주주의가 수출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시한다. 먼저 시장점유 소수집단은 시장주의가 도입됨에 따라 거대한 부를 쉽게 손에 넣는다. 억만장자가 된 이들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박탈감과 그들을 향한 증오감은 폭발한다. 이러한 에너지는 설익은 민주주의와 만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분출된다. 정치가는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이들의 분노를 정당화시킨다. 저자에 따르면, 그 결과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르완다 학살이나 유고슬라비아 학살과 같은 것이다.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자본주의 (어떠한 부의 재분배 장치가 없는)와 민주주의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없는)를 동시에, 그리고 강제적으로 이들 국가에 도입함으로써 이 나라들은 파국에 치달았다. 그래서 저자는 서구에서조차 단 한번도 시도된 적 없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완전한 보통선거 민주주의의 동시 도입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믿음을 비판하고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일종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다. 국가는 이러한 박탈된 다수의 분노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부의 재분배 프로그램이든, 차별수정정책이든, 기업들의 자발적인 기부 프로그램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렇게 지극히 불평등한 경제문제를 해소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어떤식으로든 폭발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한국에 도입하면 어떨까. 저자가 책에서도 지적하듯 한국에는 시장점유소수집단이 없다. 좋든 나쁘든 한국에는 인종/민족적으로 이질적인 소수집단의 규모 자체가 적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정치적/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는 우리와는 관계 없는 일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흔히 양극화라고 부르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고 있으며 앞으로의 전망 역시 그리 밝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장의 형태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한 채 한국은 경제성장률에만 집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파이가 커지면 분배가 될 것이고 그것으로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안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리는 현재에도 도무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현재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에서 지적한 비정규직의 덫에 걸린 20대들이 그 중 하나이다. 고통받는 한국 사회의 병리적 특성은 이미 최근 몇 년 벌어진 사태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통받는 대중은 영웅을 원하며 동시에 희생양을 원한다. 한국사회의 기독교를 향한 비이성적 분노는 어쩐지 저자가 지적한 시장점유 소수집단들에 대한 분노와 닮아보이기도 한다. 20대, 비정규직, 지방. 한국 사회에서 박탈당한 다수는 점차 커져가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각자 살아남아라는 잔인한 논리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믿음이 지배적일 것 같다는 생각은 앞날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Posted by Ad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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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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