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항공편으로 터키를 떠날 때 나는 심한 눈폭풍으로 인해 공항에서 며칠이나 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려야 했다. 언제 비행기가 떠날지 모르니 공항에 꼼짝없이 묶여있어야 하는 형편이었고 며칠간 그렇게 지내니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특히나 에어 프랑스가 자신의 고객들에게 일급 호텔을 제공하는 반면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는 알 이탈리아에 대해 더 화가 났고.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비행기를 탔던 이탈리아인들은 얼마나 낙천적이고 유쾌했던지. 마침내 비행기가 터키를 떠나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내린 이탈리아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다들 얼싸안고 즐거워했다. 그들의 행복한 기운은 내게도 전염되어 피곤함에 얼굴을 굳히고 있던 나도 결국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 중 하나이다.
이탈리안 로맨틱 코메디 <빵과 튤립>은 그 때 보았던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대책없이 따스하고 유쾌한 영화이다.
16살, 18살의 남자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주부인 로살바는 가족과 단체관광을 떠난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버스에 타지 않았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가족들 덕분에 휴게소에 남겨지게 되고 데릴러 갈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호통을 치는 남편의 말을 듣는 대신 히치하이킹으로 집에 가려 한다. 그 와중에 그녀는 차를 태워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베네치아에 한번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네치아로 행선지를 돌린다. 처음에는 베네치아를 한번 둘러본 이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바꾸고 베네치아에 당분간 더 머물기로 결심한 후 꽃집에서 일자리를 잡는다. 남편한테 큰 소리 한번 못칠 것 같은 가정주부인 그녀지만 로살바는 천연덕스럽게 집 전화에 자신이 베네치아에서 일자리를 잡았다는 사실과 "가정주부에게도 휴가는 필요하잖아요?" 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로맨틱 코메디인만큼 이런 영화에서 로맨스가 빠질리가 없다. 돈이 떨어져 묵을 곳이 없어진 로살바에게 식당의 웨이터인 페르난도는 자신의 집에 묵게 해주는데 이 나이 많은 아저씨,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고풍스러운지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이다. 첫날 자신의 집에 묵게해주면서 로살바에게 하는 말이 이런식이다: "당신의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면 문을 잠궈도 좋소." 말투가 매사에 이런 식이라서 로살바를 위해 마련해놓은 아침식사와 함께 식탁위에 올려놓은 쪽지는 한 편의 시처럼 유려하다.
한편 이 옆집에는 마사지업을 하는 순진한 아가씨가 살고 있는데 수도꼭지를 잠글 줄 몰라 화장실을 물바다로 만든 이 아가씨를 도와주게 된 계기로 로살바는 그녀와도 친구가 된다.
이렇게 베네치아에서 행복한 일상이 흘러가는 동안 로살바의 남편은 추리 소설 읽기가 취미라는 구직자를 (로살바의 남편은 회사 사장이다) 사립탐정으로 고용해서 베네치아로 보내는데...
그 이후 이런저런 사건을 거쳐서 결국 로살바는 페르난도와 행복한 삶을 시작하고 이웃의 아가씨 역시 행복한 사랑을 시작한다. (누구와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듯.) 로살바는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아코디언을 다시 연주하게 되었고 페르난도는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들은 오랫동안 잊었던 행복을 다시 찾고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이런 영화를 볼 때면 드는 생각. 사랑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개개인에게는 행복이자 구원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믿는자에게 구원이 찾아오리라.
Posted by Adella

블로그 이미지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Adella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