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세 주인공 - 루크, 시몬, 캐서린 - 의 기이하지만 사랑스러운 이야기. 산업 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테러의 공포속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먼 미래를 살아가는 루크, 시몬, 캐서린을 이어주는 건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 월트 위트먼, 그리고 하얀 도자기 그릇이다.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과거, 현재, 미래의 뉴욕은 세밀하게 묘사되고, 주인공들은 강박적으로 월트 위트먼의 시를 인용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의 주인공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하얀 도자기 그릇은 이 세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이어주기도 할 뿐더러 이 이야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이야기인지 보여준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루크는 사고로 죽은 형 대신 공장에서 일을 해서 받은 첫 주급으로 캐서린을 위해 아무 쓸모도 없는 하얀 도자기 그릇을 산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캐서린은 도자기 수집을 하는 시몬에게 주기 위해 허름한 가게에서 하얀 도자기 그릇을 산다. 그리고 세번째 이야기에서 루크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의 소유였지만 길거리에서 팔리고 있는 하얀 도자기 그릇을 다시 사들인다. 아무 쓸모도 없는, 그리고 길가에서, 혹은 허름한 가게에서 파는 이 하얀 도자기 그릇은 그러나 소중한 사람을 향해 뻗은 작은 손짓이다. 비록 그 감정을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각 이야기의 결말에서 주인공들은 (첫번째 이야기의 루크, 두번째 이야기의 캐서린, 세번째 이야기의 시몬) 소중한 이를 위해 이해하기 힘든 희생을 감수한다. 루크는 자기의 몸을 다치게 하고, 캐서린은 직업을 포함한 자신의 기반을 모두 버리고, 시몬은 미래를 포기한다. 어째서...? 라고 질문을 던질만큼, 그리고 자신들조차 자신의 선택을 다시 되돌아봐야 할 정도의 선택들이지만 선택을 내리는 그 순간만큼은 절박하고 진실되고, 아름답다.
위트먼의 시는 소설의 아주 중요한 모티브이지만 솔직히 시에 대해서는 젬병인지라 이 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세 이야기 모두에 인용되는 구절들이 있는데 그 구절이 각기 다른 이 이야기들에서 얼마나 절묘한 순간에 쓰이는지 정말 읽으면서 감탄을 했다. 이 시를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의미가 모호해 보이는 구절들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이야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건지.
이 소설은 '세월'과 꽤 유사하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세 가지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이야기들의 접점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지만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루크, 캐서린, 시몬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인데 첫번째 이야기의 화자는 루크, 두번째에서는 캐서린, 세번째에서는 시몬이 화자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더라도 전혀 다른 캐릭터이긴 하지만 또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기도 한데 마치 세 명에게 모두 발화할 기회를 준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세번째 이야기의 시몬의 이야기를 들으면 두번째 이야기의 시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세월'처럼 이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세월'을 영화로 만든 제작사에서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는데 기대된다. 그런데 세번째 이야기만 영화로 만든다는 얘기에 조금 실망. 이 세 이야기를 한 영화에 다 담아내는 게 좀 무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세월'처럼 세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영화로 만들면 너무 멋질 것 같은데. 세 이야기를 크게 관통하는 건 주인공의 이름들, 위트먼의 시, 하얀 도자기 그릇, 뉴욕이라는 배경이긴 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하는, 세 이야기가 만다는 교차지점들이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영화로 만들면 정말 근사할 것 같다.
Posted by Adella
아, 역시 마이클 커닝햄이 좋다. 유리처럼 깨질 것 같으면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섬세한 감수성이 너무나 좋다. 글을 읽는 내내 그가 보여준 이들 주인공들의 세계에 푹 빠져서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글의 마지막은 정말 마지막다워서 한동안 곱씹어 읽었다.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But as I stood in the water, something happened to me. I don't know if I can explain this. Something cracked. I had lived until then for the future, in a state of continuing expectation, and the process came suddenly to a stop while I stood nude with Bobby and Erich in a shallow platter of freezing water. My father was dead and I myself might very well be dying. My mother had a new haircut, a business and a young lover; a new life that suited her better than her old one had. I had not fathered a child but I loved one as if I was her father-I knew what that was like. I wouldn't say I was happy. I was nothing so simple as happy. I was merely present, perhaps for the first time in my adult life. The moment was unextraordinary. I realized that if I died soon I would have known this, a connection with my life, its errors and cockeyed successes. The chance to be one of three naked men standing in a small body of clear water. I would not die unfulfilled because I'd been here, right here and nowhere else. I didn't speak. Bobby announced that the minute was up, and we took Erich back to shore.
글 내내 자신의 삶에 무언가가 결여되었다고 느끼던 조나단은 이렇게 마지막에, 비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상황-아버지가 죽고, 클레어가 아이와 함께 떠났고, 에리히는 죽어가고 있으며, 자신도 곧 그처럼 죽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충만함을 느낀다. 그렇게 삶은 아이러니한 것이니 닥쳐올 혹은 닥쳐온 비극에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불안정하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삶의 충족감은 지극히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오지만은 않으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 확실하고 안정된 관계만이 전부가 아니다. 커닝햄은 앨리스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조나단, 바비, 클레어의 unorthodox한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글은 마치 따뜻한 위로와도 같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격려와도 같다. 이 사회가 인정하는 틀에 들어맞는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그의 글은 많은 힘이 되어 준다.
Posted by Ad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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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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