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LA 타임즈 해외 특파원인 저자가 쓴 50년간의 유엔의 역사에 대한 글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책이 좀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이스라엘 건국, 한국 전쟁, 수에즈 운하, 콩고, 쿠바 미사일 사태, 베트남, 6일 전쟁, 걸프 전쟁,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제적인 사건들을 다루면서 UN의 역할, 외교적 노력을 흥미진진하게 다룬다. 유엔 역사 초반의 글들은 당시 유엔 사무 총장의 자서전이나 전기에 너무 의존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랑 겹쳐서 그런지 더 다각적인 시각에서 사건들을 분석해서 더 흥미로웠다. 이 책은 유엔 창립 당시 국가들 사이의 갈등, 유엔 사무 총장 선출을 둘러싼 에피소드들, 유엔 사무 총장들의 개인적 특성과 외교 방식들, 제 3세계 국가들과 안전 보장 이사회 소속 국가들 사이의 갈등과 유엔이 참여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잘 엮었다.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도 하고 또 유엔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다보니 이 책에서 다루는 국제적인 사건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이 책에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래도 국제적 사건들에 해박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충분한 정보를 전달한다.
저자도 사람인만큼 유엔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국가들을 아주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약간이지만 친 이스라엘, 반 제3세계, 자국 옹호 성향이 느껴졌는데 부당하게 편향된 시각은 아니라 책 읽는데 지장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국제 정치에서 유엔의 역할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 
Posted by Adella
코윈님 댁에서 보고 알게된 책인데 정말 모든 사람들이 다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책의 부제목이 이 책의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해주는데 이 책은 우리 뇌가 어떻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행복은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것이다.바로 뇌를 보면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할 때 행복한지 알 수 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내 기분은 쉽게 변덕을 부려 찰나의 순간 어렴풋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약간 쌀쌀했던 그 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오던 그 순간 나는 설명할 수 없지만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그런 순간 순간의 행복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 감정은 나의 착각도 아니었고 우연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것을 하면 행복해진다, 라고 선전하는 책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차근차근 과학적으로 답을 해주는 책이다. 행복의 원천은 하나가 아니며 개인 혼자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활동, 성취가 중요한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마저 나의 행복에 중요하다. 예를 들면 그 사회의 빈부격차가 적을수록 사람들은 행복하며 사회의 중요한 결정들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사람들은 돈이 행복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빈곤하다면 소득이 증가한만큼 행복이 증가하지만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는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급격히 약해진다. 사람들은 만족과 행복을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물질적 풍요가 만족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은 꽤나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한다. 그래서 모두가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 사회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Posted by Adella
한국에서도 널리 소개되었던 <총, 균, 쇠>를 읽었다. 과학자가 쓴 역사책이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역사책. 이 책은 파푸아 뉴기니에 사는 얄리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저자의 친구인 얄리는 왜 서구 문명은 이렇게 발전했는데 자신의 고향은 이렇게 기술 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책은 서술 의도와 답이 매우 뚜렷하다. 많은 사람들이 문명간 불균등한 발전 속도를 인종간의 능력 차이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인종간의 차이 때문에 아니라 주어진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의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신대륙 주민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직접적 원인은 이 책의 제목처럼 총, 균, 쇠 덕분이었지만 그러한 차이점이 발생하게 된 근원에는 환경의 차이가 있다. 저자가 지적하는 결정적인 환경적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식량 생산 환경: 유라시아 대륙은 다른 대륙들보다 농사와 가축에 적합한 동 식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많은 대형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결론이지만 저자는 어째서 아프리카의 많은 대형 동물들이 가축에 적합하지 않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일찌감치 대형 동물들이 멸종하였다. 

2) 축: 유라시아는 남북의 거리가 좁고 동서의 거리가 넓다. 동서로 퍼진 지역들은 대체로 기후나 환경이 비슷하여 동식물이나 기술 등이 비교적 쉽게 전파될 수 있었지만 동서가 좁고 남북의 거리가 넓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는 기후 차이로 인하여 동식물 기술 전파에 어려움을 겪었다. 저자는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는데 고대 중동지역에서 시작된 농작물이나 가축은 비교적 짧은 시간안에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전파되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북 아메리카 / 남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서 거의 전파가 안 되었고 아프리카에서도 사하라 사막 이남과 이북 사이에 교류가 거의 없었다.

3) 대륙간 교류: 아프리카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대륙간 교류가 가능하였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많은 섬들과 아메리카 대륙은 구대륙으로 부터 완전 고립되어 있어서 기술 발전이 더욱 더디게 되었다.

4) 땅의 넓이과 인구 밀도: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을수록 식량 생산 기술과 정치적 공동체 발전이 빠르게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은 다른 대륙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이 일종의 출발점이 되기를 원하며 마지막 단원에서는 다양한 연구 주제들을 제시하고 이 책을 읽고 나면 떠오를만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간략한 답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은 유라시아 대륙이 왜 다른 대륙보다 우위를 점했는가를 설명해주지만 왜 유럽이 중국을 앞서가게 되었는지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저자는 그에 대해서 중국이 빠르게 정치적인 통합을 이룬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는 얘기를 한다. 이른 정치적 통합은 중국에 여러 가지 이점을 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층부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전체 사회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일찍 발전된 항해 기술을 보유했지만 후에 정치적 권력을 쥐게 된 집단이 항해 기술을 금지하면서 그 기술력의 우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유럽은 발전이 느리고 따라서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그게 기술 도입에서는 어떤 이점을 주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한 왕가가 어떤 기술을 거부하더라도 다른 왕가에서 그 기술을 받아들이고 성공한다면 다른 집단들도 결국은 기술을 받아들여 그 기술이 사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한 시점에서의 이점이 다른 시점에서는 단점으로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저자가 꽤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저자는 어떤 한가지 요소가모든 것을 결정한다, 라는 설명을 지양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지하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항변하는 것처럼 저자는 환경 결정론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인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 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책 말미에는 더 읽을만한 책 리스트를 제공하는데 그래서 저자가 다룬 특정 분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더 많은 관련 서적을 읽을 수 있다. 나도 그 중에서 읽고 싶은 책들도 몇 권 발견했다: 

The Great Human Diasporas 
The Rise of the West 
The Bell Curve: Intelligence and Class Structure in American Life 

그리고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책도 다시 읽어볼까 싶다. 




Posted by Adella
Battle Cry of Freedom을 읽고 난 후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의 사람들에 흥미가 생겨서 읽게 된 책이다. 책의 뒷편 표지를 보니 Battle Cry of Freedom 저자의 추천 문구가 인용되어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기분은 좀 복잡하다. 이 책에는 남북전쟁, 특히 남부군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모습이 각양각색이라서 더욱 그렇다. 남부군에 속했던 선조들의 영광을 기리는 단체 소속 회원들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유해해 보이지 않는다), 남북전쟁 당시의 생활상, 특히 병사들의 생활상을 재현하는 취미를 가진 이들도 있는가 하면 (역시 그렇게 유해해 보이지 않는다),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며 유대인 음모론을 주창하는 KKK 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도 있고 (유해하다) 그저 비참한 남부의 현실을 잊기 위해 과거의 영광된 날들 (이라고 그들이 믿고 있는)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다. (가엾다.)  

미국은 어떠어떠하다 라고 정의하기 어려울만큼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사실을 더 절감했다. 가끔 신문에서 어느주에서 의사당에 걸려 있던 남부기를 내리려고 했는데 반대에 직면했다더라, 라던가 어느 주의 법원에서 법원 건물에 걸려 있던 십계명을 치우려고 했더니 또 난리가 났더라, 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때 그 기사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100년도 전에 이미 패배한 남부군의 깃발을 지금까지 걸어놨다는게 더 이상하고 어이없게 법원에 십계명은 왜 걸려있나 종교 단체도 아닌데 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남부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어째서 그런 것들이 이슈가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저자는 남북전쟁 때 남부군에 가담했던 주들을 여행하면서 어떻게 남북전쟁이 아직도 현재적 이슈가 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가령 버지니아 리치몬드에는 Monument Avenue가 있는데 이곳에는 남부군의 군 지도자들의 동상들이 세워져있다. 저자가 이 여행을 할 동안 리치몬드 시는 리치몬드 태생의 흑인 테니스 선수의 동상을 Monument Avenue에 세우려 한다. 그러자 논란이 벌어지는데 어떤 백인들은 남부군의 지도자 동상들이 세워진 신성한 곳에 관련 없는 동상을 설치하려 한다면서 반대하고 어떤 흑인들은 반역자이며 노예제 옹호자였던 이들 틈에 흑인 스포츠 영웅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모욕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통합의 의미에서 계획대로 Monument Avenue에 그의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한다. 앨라배마의 한 도시에서는 고등학교 농구팀 이름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는데 그 농구팀의 애칭이 남부군을 가리키는 Rebels다. 이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바꾸자는 건의가 들어오는데 일부 백인들은 이 제안에 격렬하게 반대를 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공공 주택가를 개발하는데 그 단지 이름이 노예상인이였으며 남부군의 가장 무도한 학살자 (물론 남부의 군 지도자이다)였던 이의 이름을 땄다는 사실 때문에 논란이 일어난다. 특히나 이 주택단지의 거주민이 대부분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주택단지의 이름은 결국 민권운동의 지도자의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에는 남북전쟁과 관련된 온갖 에피소드들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도 등장하는데 이 사건은 캔터키에서 벌어진다. 한 백인 커플이 허니문을 떠나는데 가는 길목에 주유소에 잠시 들린다. 이 백인 커플의 차는 남부기로 치장되어 있는데 그 주유소에서 배회하고 있던 흑인 소년들은 이 남부기에 모욕감을 느끼고 이들 커플 차를 추격한다. 한 흑인 소년이 마침 총을 가지고 있었고 이 백인 커플 차를 향해 총을 쏘는데 백인 남자가 이 총을 맞고 죽는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이 일대에 크로스 버닝 (Cross Burning) 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이 작은 마을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되고 FBI, NAACP (전 미국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 그리고 남부군 옹호/찬양 단체들이 밀려든다. 남부군 옹호/찬양 단체들은 남부기로 인해 죽은 이 남자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기 바쁜데 정작 죽은이는 남북전쟁과 남부군의 가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의 부인에 따르면 그가 소유하던 차도 빨간색이고 남부기도 빨간색이라 잘 어울려서 장식으로 썼을 뿐이다. 그러나 저 단체들에게 그런 점은 안중 밖이고 고인은 새로운 영웅으로 탄생한다. 
이 남자를 죽인 흑인 소년도 역시 남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원래 시카고 출신인데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피우는 아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조용하게 지내라며 캔터키 친척집에 보내면서 이 소년은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남부기가 뭘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의 흑인 친구들이 남부기에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희미하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날 밤 사건을 저지른 15살의 소년은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조금 더 덜 무거운 에피소드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관련된 에피소드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로 알려진 조지아는 이와 관련된 관광 지역들을 개발하였고, 이 소설에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저자는 비비안 리와 꼭 닮아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연기하는 여성을 만나고 (그녀는 일본에 초대 된 적도 있고 천황과 천황비도 직접 만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애슐리의 집 Twelve Oaks의 모델이 된 집이라는 집에도 가보고, Tara로 추정되는 곳에도 가본다. 재미있는 건 이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는 곳들을 탐험한 후 저자는 시의 역사가에게 이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하는데 이 역사가는 자신이 마가렛 미첼과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마가렛 미첼은 소설 배경이 되는 시기의 이 지역 사람들의 이름을 대조해보고 자신의 주인공들과 겹치지 이름이 없도록 신중을 기했으며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탐방하여 자신이 묘사하는 지형과 유사한 곳이 없도록 재차 확인을 했다.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세계과 완전히 픽션의 세계에만 머물기를 바랬으며 어떤 지역 혹은 사람이 이 소설의 실제 모델임을 자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그런 그녀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대성공을 한 이후 조지아 주는 이 역사가의 도움을 통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투어 루트를 개발했고 마가렛 미첼이 그 점에 매우 화를 냈다는 것이 이 역사가의 이야기였다.

남부군에 애착과 향수를 가지며 남부군을 기리는 것들에 집요하게 집착을 하는 이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나는 점차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던 이 이야기들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승리자인 북부군에 의해 쓰여진 역사를 다시 쓰고 싶어하며 남부군을 기리는 동상, 기념물에 목숨을 건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역사관에 따라 서술한 역사책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들의 자녀를 구미에 맞게 가르치기 위해 홈스쿨링을 한다. 역사 서술을 둘러싼 이 전쟁은 우리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원치 않은 방식으로 인간 사회의 보편성을 재확인한 기분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좀 독특한 인물들이긴 하지만 이 책은 이들을 통해 남부 사회를 조명한다. 신화화되고 왜곡된 과거의 영광을 제외하면 즐거운 일도 긍정적인 일도 없는 침체되고 빈곤한 남부 사회를 말이다. 민주당원인 내 친구는 부시의 8년 집권 이후에도 공화당이 50%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도대체 뇌가 없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지만 남북전쟁을 통해 과거의 영광과 부를 모두 북부에게 빼앗겼고 그래서 지금도 남부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대변해주는 공화당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닌 것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데 정치에만 있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책은 일종의 테마 여행기인 셈이기도 한데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은 저렇게 해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들리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다른 여행의 기회를 발견하기도 한다. 여행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물론 나는 저자의 탐험심 넘치는 행각들을 보며 여성 여행자인 나로서는 따라하기에는 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전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종군기자인데 미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저술하기 전 중동에서 몇 년간 지냈다. 중동에서의 기록을 담은 책이 Baghdad without a Map and Other Misadventures in Arabia 인데 이 책도 언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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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애트우드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작가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책은 주제별로 여섯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 Orientation: Who do you think you are? – what is a “writer,” and how did I become one?

이 챕터에서 애트우드는 그녀 자신이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은 그녀의 오빠였고 점차 시간이 갈수록 그녀 역시 이야기에 참여하게 된다. 7살 때 처음으로 연극을 썼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다. 소설도 썼지만 첫 장면을 넘어가지 못했다. 10살 때 그녀는 에드가 앨런 포의 전작품을 읽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다. 이 시기에 성교육은 전무했지만 그녀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독서를 통해 삶의 부도덕한 측면들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녀 주위에 작가는 한 명도 없었고 식민지 멘탈리티에 젖어 있던 캐나다에 캐나다 작가란 생소한 개념이었다. 작가는 영국 그리고 유럽 대륙에 있는 존재였다. 이런 환경에서 그녀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 그녀는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어느날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예술가 그룹에 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며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의 세계를 엿보게 되고, 처음 문학 잡지에 등단하면서 작가가 되기 전의 그녀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작가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2. Duplicity: the jekyll hand, the hyde hand, and the slippery double – Why there are always two

애트우드는 이 챕터에서 작가 내부에 있는 충돌하는 두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작가라는 정체성과 일상을 살아가는 자연인의 정체성은 분리되어 있는가? 애트우드는 보르헤스 등을 인용하면서 정해진 수명을 가지고 있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나와 글을 쓰고 그리하여 영원히 불멸하는 작가인 나로 분리되는 작가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3. Dedication: The Great God Pen – Apollo v. Mammon: at whose altar should the writer worship?

흔히들 예술가는 예술의 세계에 헌신하는 사제들이라고 말한다.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는 예술이라는 신을 경배하는 사제이므로 개인적 삶을 희생하고 온전히 오롯이 오직 예술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작가도 피와 살로 구성된 사람이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그러므로 돈이 필요하다. 작가가 부딪치는 이 딜레마에 대해 이 챕터는 재미있게 서술한다.

4. Temptation: Prospero, the Wizard of Oz, Mephisto & Co. – Who waves the wand, pulls the strings, or signs the Devil’s book?

작가는 예술 그 자체를 위한 글을 써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에 의미 있는 글을 써야 하는가? 만약 작가가 후자의 견해에 따라 글을 쓴다면, 그리고 그가 글을 잘써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는 어떻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하는가? 여기서 애트우드는 문학 작품들에 등장하는 세 명의 마법사들을 통해 능력 있는 작가가 빠질 수 있는 유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5. Communion: Nobody to Nobody – The eternal triangle: the writer, the reader, an the book as go-between

이 챕터는 작가와 독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누가 내 책을 읽을 것인가? 독자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글을 쓸 의미가 없다. 누군가 읽는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수고를 들여 글로 남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챕터 1부터 5까지 읽으면서 이 챕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첫번째부터 네번째 챕터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다섯번째 챕터는 나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럴 것이다.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애트우드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빌려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만의 답을 내어 놓는데, 이 부분은 직접 읽어봐야 된다. 애트우드는 자신의 작품의 첫번째 독자였던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작가는 진짜 사람, 단수이며 구체적인 인물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고. 이 결론을 읽자 커트 보네거트의 단편 소설 쓰기 8가지 법칙이 생각났다. 그 리스트에서 보네거트 역시 이렇게 말했다: “일곱번째. 단 한명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글을 써라. 만약, 이를테면, 당신이 창문을 열어 세계를 사랑하려 든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폐렴에 걸릴 것이다.”

6. Descent: Negotiating with the dead – Who makes the trip to the Underworld, and why?

이 챕터의 제목이 이 책 전체의 제목이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챕터. 애트우드는 이 챕터에서 작가의 글쓰기를 이렇게 비유한다. 작가는 죽은 이들의 세계로 가서 그들과 협상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고 살아 있는 이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 그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이러한 비유를 위해 애트우드는 죽음, 죽음과 산자의 세계 사이의 메신저와 관련된 신화들을 불러들인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어디선가 이런 식으로 신화를 해석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라고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애트우드가 마지막에 인용하는 저자가 치즈와 구더기의 저자 카를로 진즈버그이다. 이 인용글을 보고 나니 대학교 때 서양사 수업 시간에 진즈버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읽었던 교재가 진즈버그의 The Night Battles 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이 수업에서 신화와 죽음과 관련된 글을 꽤 읽었던 것 같다. 어쨌든 애트우드는 이 신화들과 작가의 역할에 대해 재미있게 풀어 나간다. 나는 보너스로 대학 때 미시사 공부했던 걸 다시 떠올릴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이다. 그 때 The Night Battles의 일부 챕터들만 읽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진즈버그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역사가라서 그의 책들은 정말 재미있다.

마지막에 이야기가 좀 샜는데 애트우드의 이 책은 꽤 재미있었다. 다만 책으로 읽는 것보다 실제로 강의를 들었으면 더 재밌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애트우드가 이 책을 실제 강의를 하듯 서술해서 더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애트우드가 이 책에서 인용하는 다양한 저작들에 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더 재밌게 읽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작품들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었지만 안 읽어봤거나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 얘기를 지나가면서 해버리면 나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 조금 반감된 것 같다. 그 자신이 작가라면 더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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