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마라톤을 마치고 마라톤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읽기 시작한 책. 이제 달리기를 시작한지 일년 반 정도가 되었고 하프 마라톤도 세차례 뛰었지만 마라톤은 또 전혀 다른 문제 아닌가. 한번 도전해볼까 싶다가도 또 겁이 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챕터를 읽고 마라톤 대회에 등록했다.
저자는 처음 몇 챕터를 마라톤을 달리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할애한다. 내가 이 챕터들을 읽고 마라톤 대회에 등록한걸 보면 꽤 설득력 있는 듯. 그리고 트레이닝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지난 일년 반 동안 배운 것도 있지만 새로 알게된 것도 많았다. 특히 부상에 대해 얘기하는 챕터는 주의깊게 읽었다. 마라토너에게 필요한 식단이 어떤건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도 유익했고. 마지막 챕터는 대회 이후 빨리 회복하기 위해선 뭘 해야하는지 설명하는데 이 챕터를 읽으면서 왜 내가 지금 발목 부상을 입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회 2시간 이내에 제대로 영양 보충을 해야된다는데 그것도 안했고 대회 이후 일주일 이상은 쉬어야 하는데 너무 조급하게 달리기를 시작해서 부상으로 이어진 듯 싶다. 여러가지를 많이 배웠다. 저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도 이것저것 배우는 중. 정말 처음 시작할 때는 단순해 보였던 달리기였지만 가면 갈수록 알아야 할 점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 있다.
매우 유익한 책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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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della
이 책에 대해서는 Entitled Opinions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부활절 기념으로 스탠포드 대학 종교학 교수 Thomas Sheehan을 초대해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프로그램 호스트의 목표였으나 왠걸, 게스트는 그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채 왜 크리스챤들이 믿는 부활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Sheehan 교수는 자신이 독실한 로만 카톨릭 신자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흥미를 느낀 나는 그의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이 책이 바로 The First Coming: How the Kingdom of God Became Christianity 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의 주장은 카톨릭의 교리에 완전히 반한다. 그는 죽은 뒤 3일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부활절 스토리를 부인하고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이러한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 책에서 설명한다. 그에게 예수는 Kingdom of God을 온 생애에 걸쳐 실천한 선지자였지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크리스챤이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하고 그의 가르침에 반하는 길을 걸었다고 주장한다.

부활절: 그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사망한 예수 사후에 어떻게 부활절 스토리가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예수의 사후 부활절 스토리는 두 가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예수의 사도였던 시몬이 예수가 사후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예수의 빈 무덤 발견이다. 시몬의 증언의 어디에도 예수의 육체가 부활하고 물리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얘기는 없다. 실제로 예수가 시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빈무덤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른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 무덤 발견은 마가 복음서 16절에 처음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예수의 육체가 부활했다는 언급은 없다. 빈 무덤에 있던 천사는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고 무덤은 비어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저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반응에 주목하는데 천사가 막달레나에게 사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고 했음에도 그녀는 달아나서 아무에게도 자신이 전해들은 것을 전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두려움만을 초래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별개의 이 두 스토리는 후기 복음서에 의해 부활절 스토리로 통합된다. 후기 복음서들은 마가 복음서에 온갖 이야기를 덧붙이는데 이 이야기들에서 예수는 부활한 육체로 팔레스타인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 부활의 육체적 증거를 보여주고 사도들과 먹고 마신다.

예수의 정체: 그는 예수가 선지자에서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탈바꿈 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이 과정이 3단계를 거쳤다고 설명하는데 첫번째 단계에서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재현될 때 예수가 심판자로 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때까지 예수는 그저 하나님의 delegate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고 믿은 초기 크리스챤들에게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사후 몇 십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기다렸던 하나님의 왕국은 도래하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자 이 시간 동안 예수의 지위는 애매하다. 그러자 크리스챤들은 예수는 미래의 심판자일 뿐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는다. 처음에 크리스챤은 예수가 사망하였을 때 하나님이 예수를 입적했다고 설명하지만 그 시기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순간으로 앞당겨졌다가 다시 예수 탄생 당시로 그 시기는 앞당겨진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스토리가 탄생.) 그렇지만 이 시기까지도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이 보낸 존재로 간주된다.

이 스토리는 그 이후 전혀 다른 레벨의 스토리로 도약한다. 이 다음 단계에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빌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신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체를 빌어 태어나고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그리고 다시 그가 원래 있었던 하나님의 왕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같은 권능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러한 크리스챤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건가. 그가 이해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다. 예수는 유대교의 묵시록적인 믿음 - 미래의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와 인류에 대한 심판 - 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왕국은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미래에 이미 인간과 함께하고 있으며 우리가 해야할 일은 회개, 그리고 자비와 정의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사후 크리스챤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묵시록적 믿음을 부활시켰고 모든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예수라는 개별적 존재를 통한 실현되는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믿음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며 예수를 우상화한 것이다.

종교라는 현상에는 매혹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좀 힘들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책은 매우 뜻깊게 다가왔다. 요즘 들어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지만 종교적 믿음은 나의 생각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았는데 이런 식의 믿음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종교가 전혀 불가능한 옵션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어떤 종교에도 귀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류의 책을 읽으면서 내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저자의 소박하지만 굳건한 믿음은 정말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앞으로도 꾸준히 종교학/신학을 다루는 책을 읽어볼 계획이다. 아마 그 다음에 읽을 이 분야 책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친구가 추천해준 Anthony De Mello의 책이 될 듯 싶다.

Posted by Adella
이 책은 내가 주로 즐겨 읽는 장르의 책은 아닌데 (자아 찾기/여행 에세이) 예전에 친구가 추천해줬던게 불현듯 생각나서 읽게 된 책. 그래도 이런 장르의 책 치고는 그럭저럭 읽을만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이 읽고 싶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저자는 힘겹게 이혼을 마무리 짓고 1년간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의 테마는 Eat, 인도의 테마는 Pray, 인도네시아의 테마는 Love이다. 이 책은 여행 기간, 책의 분량, 책의 제목을 세 장소에서의 이야기들에 균등하게 할애하고 있다. 난 이탈리아 얘기가 제일 재밌었는데 아마 그 챕터에서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나 싶다. 나도 외국어를 배우는 걸 좋아하고 (저자는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서 이 나라로 간다.), 나도 이탈리아에서 음식을 먹고 한동안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저자와 스웨덴에서 온 그녀의 친구가 로마 & 나폴리에서 피자를 먹고 보인 격한 반응 - 스웨덴 친구는 스톡홀롬에서는 뭐하러 감히 피자를 만드는 시도를 하느냐, 아니 음식은 뭐하러 만드냐며 격분 - 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고), 나도 잠시라도 그렇게 유럽에서 살면서 외국어를 배우며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이 이야기는 이를테면 나한테는 동화 속 얘기와 같았다. 거기다 저자가 얼마나 재미있고 재치있게 글을 쓰는지 이 챕터는 정말 내내 키득거리면서 읽었다.

그에 비해 인도 & 인도네시아 얘기는 그냥 보통이였다. 친구가 재밌다고 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이 책의 성격을 제대로 몰랐던게 화근이라면 화근일까. 난 이 책이 영성적 자아찾기 성향이 짙은 책인 줄 정말 몰랐다. 인도 & 인도네시아의 얘기의 중심이 그런거라서 난 좀 뜨악했다. 인도에서는 아예 힌두 종교 지도자의 사원에 가서 4개월간 지내고 인도네시아에서도 발리섬의 주술/치료사와의 얘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이야기는 저자가 얼마나 이혼 때문에 고통 받았는지, 명상과 갖가지 종교적 경험을 통해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게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는데 미국인, 특히 뉴요커들이 어떻게 요가, 동양 종교, 철학에 매혹되었는지 그 서브 컬쳐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웠지만 종교적 성향이 강한 자서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나에게는 좀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요즘 간혹 삶이 방향성을 잃고 부유한다고 느낄 때마다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좀 부럽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 있던 참이라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읽을 수도 있었지만 신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했다거나 신을 영접했다는 저자의 얘기는 나에게는 너무나 4차원 너머의 얘기라서 그러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본적으로 이런 에세이를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자아도취적인 저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걸 극복하는 스토리를 싫어해서인데 이 부분이 딱 그런 스토리니. (이혼의 고통과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끊임없이 토로하는데 나중에는 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인도 이야기가 완전히 종교적 자아 찾기 여행 얘기라면 (내내 사원에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인도네시아 이야기는 그래도 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발리로 도피해서 살고 있는 서구인들의 공동체도 흥미로웠고 관광지에서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성찰도 꽤 흥미로웠다. 저자는 발리에서 여성 힐러와 친구가 되는데 가족/공동체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혼을 하고 딸과 살고 있는 이 힐러와 저자는 금세 의기투합한다. 이혼을 하면서 가족/공동체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채 힘겹게 살고 있는 이 여성을 안타깝게 여긴 저자는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 여성을 위해 집을 지어줄 돈을 모금하여 거금의 돈을 이 여성에게 안겨준다. 처음에는 이러한 믿을 수 없는 행운에 너무나 감격하고 고마워했던 그녀지만 후에 더 많은 돈을 은근히 요구하는 그녀에게 저자는 충격을 받지만 저자는 관광객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악착같이 얻어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관광지 지역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려 하는 동시에 해결책을 강구한다: 자기가 발리를 떠나기 전에 땅을 사고 집을 짓지 않으면 돈을 도로 가져가겠다고 협박하자 더 큰 돈이 없으면 땅을 살 수 없다고 하던 이 힐러는 순식간에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계약을 마무리 한다. 나도 터키를 여행하면서 친근해 보이나 관광객인 나에게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어낼지 고심하는 그들에게 실망하고 돌아선 적이 있어서 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실망했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고 그녀와 여전히 친구로 남는 저자의 모습에는 좀 감탄했다. 아마 내가 인간관계에서 그런 속성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최근에 들어서야 주고 받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상대가 뭔가를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서 그렇지 싶다.

나서서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은 아닌데 여행을 떠난다면 여행의 동반자로 삼을만한 책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저자는 용감하게 홀로 여행을 떠나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처럼 세 곳의 여행지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드는데 그런 태도는 참 좋았다. 사실 여행을 기억에 남게 만드는 건 단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들 뿐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니까.

Posted by Adella
StrayCat님이 친구분들이랑 책읽기 세미나를 하신다는 얘기에 자극 받아 동네에 있는 진보적 여성 북클럽에 가입했는데 그 달에 선정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 북클럽은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하는데 하필 내 불어 수업이랑 시간이 겹쳐서 아직 한 번도 참석은 못했지만 그래도 거기서 선정하는 책을 혼자라도 읽어보자 하는 마음에 이 책을 읽기 시작.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는 솔직히 뻔한 얘기를 재미없게 늘어놓는 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왠걸,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여성들의 공적인 & 사적인 삶의 변화를 풀어놓는 책이었던 것이다. (역시 뉴욕 타임즈 컬럼니스트는 그냥 하는게 아니었어.)

이 책은 일터와 정치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삶의 변화를 추적함과 동시에 여성들의 연애, 결혼, 가사일 분담, 아이 양육의 문제, 여성의 공적인 & 사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사회의 태도 변화를 그려낸다. 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와 일상을 살아간 일반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 내는 이 책은 미국 여성의 삶을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아주 맛깔나게 풀어내는데 같이 울고 웃으며 이 책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힐러리, 미셸 오바마, 사라 패일린의 이야기에 다다랐다. (이게 마지막 챕터.)

미국 역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배운 내용들이 많았다. Civil Rights Act는 인종, 피부색, 출신 국가, 성별, 종교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인데 원래 이 법안은 인종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만든 법안이었다. 그러다가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농담처럼 공화당민주당 (Civil Rights Act를 계속 반대했다고 해서 공화당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지니아 출신 민주당임) 의원 Howard Smith가 여성 차별 금지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민주당 의원들은 인종 차별 금지에 대해서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성 차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두 명의 여성의원들이 이 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이 수정안은 통과되었다. 후에 이 수정안 통과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Martha Griffiths가 Howard Smith에게 우리의 수정안은 엄청난 일을 성취했다고 하자 Howard Smith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Martha, I'll tell you the truth. I offered it as a joke." 그가 농담삼아 제출한 수정안이었더라도 두 여성 의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이어진다. 결혼 금지, 나이 차별, 그리고 몸무게 관리에 얽매였던 스튜어디스들이 처음으로 고소장을 접수했고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면 기업인들이 비행기를 안탈 것이라는 항공사들의 주장에 대해 Martha Griffths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What are you running, an airline or a whorehouse?" Southern Bell은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특정 직업에서 배제시켰는데 그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고 자신이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 한 여성은 고소장을 접수하고 기나긴 소송 끝에 항소법원에서 승리를 거뒀다.

60 년대의 민권운동에 기여한 여성들의 얘기는 정말 울면서 읽었다. 흑인 전용칸으로 이동하기를 거부하고 체포당한 로자 파크; 목숨을 걸고 백인 전용 버스에 올라탄 용감한 여성들 ("If I don't come back, here's a number to call."): 한 프리덤 라이더가 심하게 구타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자 나머지 프리덤 라이드가 다 취소되었다. 그러자 내쉬빌의 학생이었던 다이언 내쉬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운동을 이끌었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We fully realize that, but we can't let them stop us with violence. If we do, the movement is dead."; 집이 불타고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 투표권 운동에 적극 뛰어든 여성들 - Laura McGhee의 일화는 정말 유쾌했지만 투표권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남부로 내려온 중산측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비극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이외에도 민권운동에 기여한 수많은 여성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의 히로인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이야기, 그 이후의 백래시 (중산층 여성의 낙태 반대 운동과 같은), 사회에는 진출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집안일의 무게를 짊어지고 일과 가사일 사이의 밸런스를 찾기 위해 힘겹게 노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연방 보육 프로그램을 설립하려던 계획이 New Right Wing 세력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이야기, 젊은 여성들의 새로운 연애 방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힐러리 클린턴, 사라 패일린, 미셸 오바마의 이야기까지 이 책은 이끌어나간다.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60-70년대 여성해방을 이끌었던 여성들의 염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자기들의 노력의 산물이 사라 패일린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면 "I'd shoot myself."라는 얘기를 했다는 걸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한국에서 90년대부터 최근까지 있었던 여성 관련 이슈들을 미국도 과거에 다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미인 대회 논란, 성희롱, 데이트 강간, 안전하게 밤길을 다닐 권리, 여성과 군복무 등.) 그런점에서는 한국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나름 도움이 될만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운동이나 미국 사회사에 관심있는 분에게 강력 추천. 책의 마지막장을 덥고 나면 책 뒷면의 추천사들이 이해된다. ("A rousing epic." "Written in a lively, readable style, America's Women is an enthralling social history woven around profiles of women you've heard of and women you haven't." "A deft and entertaining work of historical synthesis.")
Posted by Adella
작년에 읽었던 슈테판 클라인의 행복의 공식과 마찬가지로 행복 심리학을 다루는 책. 이 책은 먼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코끼리와 기수의 비유를 이용한다. 코끼리는 이를테면 본성이고 기수는 이성이다. 인간은 온전히 이성으로만 작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기수가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리기 전 코끼리는 찰나의 순간에 반응을 하고 좋고 싫음을 결정한다. 이러한 코끼리가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 있고 비관적인 사람이 있다. 저자는 이를 cortical lottery라고 하는데 이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선천적으로 더 행복하게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 이 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건가. 그렇지는 않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순전히 이성적으로 앞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겠다고 결정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기수가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을 바꾸려면 코끼리를 길들여야 한다. 저자는 3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명상, cognitive therapy, 그리고 프로작. 명상은 마음을 불행하게 하는 집착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주고, cognitive therapy는 자신의 왜곡된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포착하여 그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게 해준다. 타고나기를 비관주의자로 태어나 이러한 방법도 별 소용이 없다면 약물의 힘을 빌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어떤 경우에는 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을 처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앞의 처방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면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법칙을 찾아야 한다. 첫번째 법칙은 황금률. 'Treat others as you would like to be treated' 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인간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다. 두번째 법칙은 자신의 잘못과 결점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 자신이 옳고 타인은 그르다는 태도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조장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타인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면 본격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때다. 여기서 저자는 다른 행복 심리학자들이 개발한 행복 공식을 제시한다: H (Happiness) = S (your biological set point) + C (the conditions of your life) + V (the voluntary activities). 이 챕터의 내용은 슈테판 클라인의 책에서도 접한 내용이라 꽤 익숙하다. S는 cortical lottery라는 개념을 통해 앞에서 다룬 부분이고 이 챕터에서는 C와 V에 초점을 맞추는데 행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C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소음 (지속적으로 노출되어도 사람은 소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침), 장거리 통근 (소음과 같음. 부정적 영향), 통제 부족 (자신이 주변 환경에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는 행복에 부정적 영향), 수치 (수치심은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침. 성형수술이 지속적으로 행복을 증가시키는 이유는 수치심을 감소시키기 때문), 인간관계. V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명상과 수련을 통해 집착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음으로써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고 (내면적), 인간관계, 목표, 기쁨을 추구함으로써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다 (외부적).

그 다음 두 챕터는 개인의 성장을 다룬다. 하나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와 일맥상통하는 얘긴데 지혜는 그저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챕터의 제목은 The Felicity of Virtue인데 챕터 처음의 인용글이 이 챕터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It is impossible to live the pleasant life without also living sensibly, nobly and justly, and it is impossible to live sensibly, nobly and justly without living pleasantly.

- Epicurus

Set your heart on doing good. Do it over and over again, and you will be filled with joy. A fool is happy until his mischief turns against him. And a good man may suffer until his goodness flowers.

- Buddha


이 챕터는 꽤 흥미롭다. 저자는 서구 사회가 덕목을 추구하는 철학/윤리학에서 멀어지고 상대주의/이성 중심의 철학을 추구하면서 길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문장을 아동 교육 책에서 인용한다: "My approach does not teach children what and what not to do and why, but rather, it teaches them how to think so they can decide for themselves what and what not to do, and why." 저자는 이것이 실수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단지 이성과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 챕터에서 인용한 부처나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이러한 덕목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마지막 두 챕터에서 저자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으로 사랑과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챕터 (Divinity With or Without God)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챕터이다. 저자는 무신론자이며 따라서 저자는 단순히 종교를 통해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종교가 가져다주는 고양(elevation)에 주목하는데 이러한 감정은 종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토머스 제퍼슨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감정을 설명한다:


When any...act of charity or of gratitude, for instance, is presented either to our sight or imagination, we are deeply impressed with its beauty and feel a strong desire in ourselves of doing charitable and grateful acts also. On the contrary, when we see or read of any atrocious deed, we are disgusted with its deformity, and conceive an abhorrence of vice. Now every emotion of this kind is an exercise of our virtuous dispositions, and dispositions of the mind, like limbs of the body, acquire strength by exercise.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집단적 고양 (collective elevation)을 경험한다. 이들은 세속적인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 고귀로운 사람들, 성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양(elevation)을 경험하고 아가페적 사랑을 느낀다. 이를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사례를 저자는 인용한다:


There's another kind of tear. This one's less about giving love and more about the joy of receiving love, or maybe just detecting love (whether it's directed at me or at someone else). It's the kind of tear that flows in response to expressions of courage, or compassion, or kindness by others. A few weeks after Mother's Day, we met here in the sanctuary after the service and considered whether to become a Welcoming Congregation [a congregation that welcomes gay people]. When John stood in support of the resolution, and spoke of how, as far as he knew, he was the first gay man to come out at First Parish, in the early 1970s, I cried for his courage. Later, when all hands went up and the resolution passed unanimously, I cried for the love expressed by our congregation in that act. That was a tear of celebration, a tear of receptiveness to what is good in the world, a tear that says it's okay, relay, let down your guard, there are good people in the world, there is good in people, love is real, it's in our nature. That kind of tear is also like being pricked, only now the love pours in.


한 교회의 목사가 보내온 편지에서 묘사된 이 부분을 저자는 고양의 눈물 (tears of elev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고양감을 종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픽션이 가치있는 것으로 취급받지 않았던 시절 토마스 제퍼슨은 픽션을 읽는 것을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We never reflect whether the story we read be truth or fiction. If the painting be lively, and a tolerable picture of nature, we are thrown into a reverie, from which if we awaken it is the fault of the writer. I appeal to every reader of feeling and sentiment whether the fictitious murder of Duncan by Macbeth in Shakespeare does not excite in him as great a horror of villainy as the real one of Henry IV by Ravaillac as related by Davila? And whether the fidelity of Nelson and generosity of Blandford in Marmontel do not dilate his breast and elevate his sentiments as much as any similar incident which real history can furnish? Does he not, in fact, feel himself a better man while reading them, and privately covenant to copy the fair example?


가끔 성당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정화된다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 챕터를 읽고 나니 왜 내가 종교 예식에 참가함으로써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종교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을 매혹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의 웹사이트도 만들어 놓았는데 (http://www.happinesshypothesis.com/) 꽤 유용하다. 책에 대한 소개가 있을 뿐만 아니라 Beyond the Book 코너에 가면 이것저것 유용한 정보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행복해지기 위한 to-do 리스트도 있고 저자의 추천책 목록도 있고 Know Your Strengths, Improve Your Work라는 글도 있다 (저자의 책의 덕목 개발과 관련된 글이다). 애프터 서비스까지 훌륭한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Posted by Ad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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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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