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측면에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녹아든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 소설.

일단 주인공 엘레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애트우드의 Negotiating with the Dead에서 읽은 애트우드 자신의 어린시절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엘레인과 애트우드의 아버지는 곤충학자이고, 둘 다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도시가 아닌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둘 모두 오빠와 많은 것을 공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자라서 엘레인은 페미니즘 화가로 이름을 날리는데 엘레인은 자신이 살면서 만난 사람들 - 몹시나 미워했던 어린 시절 친구의 어머니, 애증의 관계의 친구, 전통적인 가정 주부상을 벗어난 자신의 어머니, 존경하고 사랑한 오빠 - 을 그리는데 그녀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작품들은 비평가들에게 의미심장한 여성주의적 작품들로 읽힌다. 이러한 엘레인의 경험은 애트우드 자신의 경험의 반영인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게 애트우드의 작품들 역시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분석되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애트우드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비평들을 보면서 소설의 엘레인처럼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이 부분의 이야기는 매우 유쾌했다. 가령 소설에서 엘레인은 사고로 죽은 오빠를 애도하기 위한 그림을 그리는데 비평가들은 그 그림에서 남성성의 유치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읽어 낸다. 또 복수라도 하듯 친구 어머니의 적나라하며 아름답지 않은 누드를 연작으로 그려내는데 비평가들은 거기서 기성 남성 작가들이 여성의 육체를 그려내는 방식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작품으로 읽어낸다.

이 부분은 읽으면서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작가들로 분류되는 작가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가 라고 한다면 애트우드가 그런 의도로 이 부분을 서술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여성 작가가 여성의 시각으로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이 자전적인 글이 아닐까 하고 의심한 다른 이유는 엘레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세밀하고 생생해서이다. 이 소설에서 이미 성공한 화가인 엘레인은 회고전을 위해 어린 시절을 보낸 토론토로 돌아오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이 시절 기억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어느 정도 극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해도 실제로 이런 비슷한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묘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어릴 때 엘레인과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여자 아이들의 공동체에서 이런 경험은 보편적이었던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애트우드 역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닐테고. 물론 그런 보편적인 경험을 글로 써내는 것은 애트우드와 같은 작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 이것이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특히 여성 독자들은 애트우드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할 것 같다. 그런 것이 작가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개별적인 고통을 겪는 개인들에게 그 경험의 보편성을 일깨워주고 그를 통해 삶의 단면의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것.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그 당시 왜 내가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지 어째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작가는 그리 흔치 않다고 생각하고 그게 내가 애트우드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Posted by Ad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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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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