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이야기 (1985)The Blind Assassin (2000)에 이어 세번째로 접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페넬로피아드 (2005)는 여성주의적 상상력와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유머로 가득찬 작품이다.

이 책은 오디세우스가 20년간 방랑을 할 동안 정숙하게 그를 기다린 페넬로페와 그녀의 시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애트우드 나름의 해석을 곁들여서 말이다. 이 소설은 나처럼 호머의 오디세우스를 읽지 않아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한 가지 문제라면 호머의 해석을 읽기도 전에 현대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글을 먼저 읽어버려서 일종의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데 그렇다고 고작 200 페이지 남짓의 페넬로피아드를 읽기 위해 이제와서 오디세우스를 읽기에는 조금 벅차다.) 

애트우드의 전작들처럼 이 책도 역시 진지하고 나름대로 무거운 이야기인데도 전작들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책의 구성 덕택이다. 이 책에는 두 화자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데 하나는 페넬로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페넬로페의 12명의 시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페넬로페의 이야기가 진지한 본편이라면 시녀들의 이야기는 노래와 패러디로 구성되어 있어 유쾌발랄하다. 이 책 마지막에 실려있는 애트우드의 노트를 보니 이는 그리스 연극의 형식을 빌린 것으로 그리스 연극에서는 본편이 진행되기 전에 본편을 패러디한 간막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이 챕터들은 The Chorus Line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는데 나는 이 챕터들을 통해 애트우드가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애트우드의 시는 아직 한번도 안 읽어봤는데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경쾌하고 아름다운 시들이 이 챕터들에서 등장하게 된다. (이 챕터들이 시만으로 구성된 건 아니다. 어떤 챕터는 시녀들의 인류학 강의로 구성되어 있고 - 이 부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웃었다. 페넬로페 이야기를 어떤식으로 재해석한 것인지에 대해 애트우드는 이 챕터에서 너무 적나라하게 서술해버린다. - 어떤 챕터는 오디세우스에 대한 재판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아직 내가 읽지 않은 애트우드의 책들도 많고 그녀가 여전히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서 매우 기쁘다. 일단 애트우드의 다른 책들은 아껴두고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 어슐러 르 귄의 소설을 읽을 계획이다. (요즘 논픽션만 계속 읽었더니 픽션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졌다.) 

*페넬로피아드가 국내에 번역되었는지 찾아보려다가 발견한 이 책에 대한 서평. 내가 쓴 글보다는 훨씬 깊이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해서 여기 링크를 걸어 둔다. 

Posted by Adella
'자유와 성'이라는 제법 딱딱한 제목이 붙여진 책이지만 이 책은 Roe v. Wade의 기원부터 Roe v. Wade의 이후까지의 모습들을 흥미롭고 세세하게 추적해나가는 역사책이다.
 
Roe v. Wade에 대해 이야기할 때 Griswold 케이스를 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Roe v. Wade의 프라이버시의 권리는 Griswold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Roe v. Wade를 공부할 때 Griswold 케이스를 알게 되기야 했지만 Griswold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해서 이 케이스가 대법원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Griswold는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한 커네티컷 법안이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케이스이다. 피임기구 사용 금지라니, 어쩐지 한 세기 전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Griswold 판결은 1960년대에 내려졌다. 그 이전까지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하는 커네티컷 법안은 엄연히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커네티컷의 여성들이 피임을 하지 않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이 책은 서술하고 있다. 특히 주치의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은 이미 주치의를 통해 피임기구를 처방받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인해 저소득층 여성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저렴한 클리닉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피임할 권리를 옹호하는 Planned Parenthood 커네티컷 지부는 무려 몇 십 년 동안 열심히 이 법안을 폐기시키기 위해 의회 로비 활동을 벌이지만 피임이 자연법에 위반된다는 입장 하에 강력하게 이 법안의 지지 로비 활동을 벌인 카톨릭 교회 덕택에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계속된 실패로 완전히 침체된 이 운동에 새로운 리더로 등장한 것이 바로 Estelle Griswold이다. Planned Parenthood는 몇 번 법원을 통해 이 법안을 무력화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보수적인 주 대법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Griswold 케이스 이전에 연방 대법원까지 도달한 케이스들은 기술적인 문제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문제란 이 법안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실제로 집행되는 일은 드물어서 이 법안에 이의를 제기한 원고들에게 문제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판결이 연거푸 내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Griswold는 자신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결국 성공을 한다. 그녀의 케이스는 결국 대법원에 도달하고 대법원은 진작 폐기되었어야 할 오래된 이 법안에 위헌 판결을 내린다. Roe v. Wade를 위한 초석이 세워진 것이다. 

이 책 이전에 읽은 Closed Chamber의 저자는 Roe v. Wade 판결이 성급한 감이 있었고 더 합리적인 법 논리가 개발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을 통해 Roe v. Wade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에 미국의 많은 주에서 낙태를 완전히 금지하고 범죄로 만드는 법안들이 만들어지고 1960년대까지 이 법안들은 대부분의 주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낙태시술을 원하는 여성들은 비밀리에 낙태시술을 하는 의사 (혹은 의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시술을 받아야 했고 더 월이라는 영화에서도 잘 보여주는 것처럼 불법 낙태시술로 인해 여성들은 빈번하게 목숨을 잃었다. 60년대부터 완전히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수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60년대 후반에 힘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임신한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한 경우,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희생자인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하여야 한다는 식의 수정 법안들이 옹호되기 시작했고 낙태권 활동가들 덕택에 (또 다시) 카톨릭 교회의 반대를 넘어서 몇몇 주에서는 통과되기도 했으나 조만간 낙태권 옹호자들은 수정 법안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곧 폐지론으로 견해를 바꾼다. 낙태권 옹호자들이 폐지론으로 견해를 옮겨가면서 카톨릭 교회의 반대도 점점 거세진다. 몇몇 주에서 낙태금지법안을 폐지하는 법안들이 성공적으로 통과되지만 반대세력의 캠페인도 점점 강화되어 Roe v. Wade의 판결이 내려질 무렵에는 여러 주에서 낙태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Roe v. Wade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Roe v. Wade 그 이후를 다루고 있는데 소위 pro-life 세력들이 벌이는 일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혐오감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는 Roe v. Wade에 대해 명료하게 반대 입장을 취했고 여러 차례 Roe v. Wade를 뒤집으려는 노력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병원들에게는 낙태 관련 조언을 하지 말라는 규정들을 만들기도 했고 (그리고 대법원은 이런 규정이 합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합헌 판결을 내린 판결문에도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결국 다른 병원 가면 되지 않느냐는 건데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자유롭게 다른 주나 다른 병원으로 갈 경제적 능력이 안되는 저소득층 여성들에게만 불공평하게 짐을 안기는 것 밖에 더 되나. 거기다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들을 살해하고 낙태 클리닉 직원들과 낙태 클리닉을 찾아가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일을 저지른 자들이 전 KKK 회원들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할 말을 잃고. 사실 난 pro-life 세력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들인가 좀 궁금했는데 이 책에 인용된 어떤 학자에 따르면 pro-life 활동가들 대부분이 적당히 고등교육을 받고 가정 밖에서 직장을 가져보지 않은 결혼한 여성들이다. 그 학자에 따르면 이들 활동가들은 진심으로 태아의 생명을 염려한다기보다는 피임, 낙태가 상징하는 자유로운 성생활과 비전통적인 문화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낙태 반대라는 이슈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낙태가 영아 살해랑 똑같다고 생각하는 하드 코어 크리스챤들이 여기에 추가될 것이다. (겹치는 부류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94년에 출판되었고 이후 개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읽은 책은 94년 출판된 책이다. 아마 이 책에서 다룬 Casey 이후의 연방 대법원 판결들도 다루고 그 이후의 상황들을 추가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Casey 이후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는 알고 있기도 하고 그 이후의 대법원 판결들은 우울할 뿐이니 그다지 읽고 싶지는 않다. 

무려 7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이 책의 주제를 조사한 끝에 이 책을 출판하였다고 하는데 그 세월이 충분히 이해될만큼 이 책은 세세하게 피임부터 낙태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 개입한 사람들과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이슈와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격동적인 역사를 거쳐온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운동들도 이러한 역사가의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조명을 받았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책을 읽을 필요성도 함께. 

미국의 피임 & 낙태 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저자가 쓴 책 중에 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인 Bearing the Cross라는 책도 있다고 하는데 이 책도 앞으로 읽을 책의 목록에 올리기로 했다.  
Posted by Adella
종종 5-4 판결로 드러나는 미국 연방 대법원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세밀하게 묘사한 책. 10년 전에 출판된 책이지만 지금의 대법원의 모습과 당시 대법원의 모습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미국 연방 대법원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대법관 블랙먼의 로 클럭 (law clerk)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삼고 오랜 리서치와 대법원 로 클럭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대법원 내부 사정을 샅샅이 드러낸다. 
이 책을 처음 읽게 된건 대법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서였고 저자가 어떤 성향과 시각으로 이 책을 서술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그랬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이 책은 리버럴 성향의 로 클럭이 보수적인 성향으로 점차 탈바꿈해나간 대법원의 모습을 고통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그래서 읽는 나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저자가 서술한 시기의 중요한 판결은 많겠지만 그는 크게 두 가지 분야메만 집중을 한다: 바로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이다. 둘 다 워낙 센세이셔널한 주제이고 많은 경우 단순한 법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와 연결되다 보니 양쪽 모두 격렬해지기 쉽상이다. (Roe v. Wade 판결이 내려진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포기 못하는 낙태 반대론자들을 봐라. 이 자들이 자신들을 노예제 폐지론자과 동일시한다는데에는 아주 기가 막혔다.) 
한 때 리버럴은 이 두 분야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사형제도는 한 때 위헌 판결이 났고 Roe v. Wade는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점차 보수화하는 대법원의 성향에 따라 점점 의미를 잃어가게 된다. 
저자는 사형제도 폐지론자인데 이 분야에서 리버럴이 패배하게 된 원인을 분명하게 공격적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추구했던 단체에 돌리고 있다. 사형제도가 위헌이 아닌 것으로 대법원이 다시 판결을 내린 후 폐지론자 변호사들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될 수 없도록 온갖 법률적 수단들을 동원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전략이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을 매우 화나게 만들었고 이 대법관들은 폐지론자 변호사들이 법률 시스템을 악용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폐지론자들이 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아젠다를 추구하는만큼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도 공격적으로 이들의 노력을 막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이들이 보호하려고 했던 이들의 권리가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폐지론자들의 아젠다에는 동조하나 이들이 전략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본다. 
저자는 또한 Roe v. Wade를 둘러싼 대법원 내부의 갈등을 통해 대법원 내부의 모습을 드러낸다. 랭퀴스트 대법관과 다른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은 끊임없이 Roe v. Wade를 뒤집을 기회를 모색했는데 다행히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 이후의 케이스들에서 반낙태 성향의 법안들이 줄줄이 합헌 판결을 받았지만 저자가 숨가쁘게 묘사하는 Roe v. Wade를 둘러싼 내부 알력 다툼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Roe v. Wade가 뒤집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리버럴 성향의 저자는 당연히 이러한 보수 세력의 움직임에 분노하지만 대법원을 리버럴 성향의 아젠다를 추구하기 위한 장으로 삼아버린 리버럴의 전략에 큰 의구심을 표시한다. 법원은 다른 권력 기관과 달리 엄격한 논리로 무장해야 하는 기관이다.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공격당할 수 있는 논리에 기반한 '올바른' 판결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 그가 보기에 사형 제도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판결의 논리도 그 기반이 취약했고 Roe v. Wade의 판결 역시 그러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기반해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은 논리적으로 비약이었고 그렇게 빈약한 논리에 기반한 덕에 낙태권은 끊임없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낙태권은 Roe v. Wade에서처럼 프라이버시에 기반할 것이 아니라 평등권을 근거로 성립되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한다. 나도 역시 동의한다. 솔직히 Roe v. Wade 판결문 읽을 때 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그렇게 터무니 없는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 책은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들이 중요한 법적 이슈에서 하나씩 승리를 거두어나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묘사하고 있어서 리버럴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좀 괴로운 책읽기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수적 성향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즐거운 승리의 기록이냐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기본적으로 그가 그리는 리버럴 성향의 판사들은 결점을 가진 인간적인 인물들이지만 (특히 그가 자신의 보스인 블랙먼 판사를 묘사하는 구절들은 진한 애정이 배여 있다) 그는 보수적 성향의 판사들은 사악하고 부정직한 천재, 모사꾼들로 묘사한다. 위키피디아를 보니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코진스키 판사 (9th Circuit의 아주 유명한 보수적인 판사)가 이 책에 대해 편파적이라고 비판했다고 하는데 그럴만도 하다. 하드코어 보수적 성향의 판사들 (랭퀴스트나 스칼리아 같은) 뿐 아니라 대충 중간쯤에 있다고 간주되는 오코너나 케네디 역시 그의 부정적 묘사를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자신들의 보스에게 보수적인 아젠다를 강력하게 밀어부친 로 클럭들 역시 아주 사악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 책 읽으면서, 이 저자 정말 용감한데?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 묘사가 공정했든 편파적이었든 나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대법관들에 대해 읽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덕택에 그저 진보적 판사들이라고 내가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판사들을 좀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현 대법관 중에서는 수터 대법관에 대한 호감도 급상승. 스칼리아에 대한 견해는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엄청 똑똑해서 더 밉지만 존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는 그의 견해를 읽을 때마다 진짜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 읽고 나서 평가가 더 하락했다. 케네디에 대해서는, 오코너 은퇴 이후로 항상 케이스를 결정하는 인물이라는 것 이 외에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보수적인 인물이지만 자신의 평판에 대해 예민하다는 저자의 평가는 조금 안도감을 준다. 평판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제일 똑똑해 같은 스칼리아가 보수 진영에 한 명 더 있으면 좀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또 다른 하드코어 보수 성향의 로버트 보크가 대법관에 임명되지 않고 케네디가 임명된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칼리아가 두 명 있다고 생각하면. 윽. 상상도 하기 싫다. 현 대법원장 로버츠나 알리토 대법관은 스칼리아 같은 인물은 아닌 것 같으니.)  
어쨌든 좀 고통스럽긴 했지만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었다. 미국 대법원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책이 아닐까 싶다. 리버럴의 시각에서 쓰여졌고 견해에 따라서 인물평이 그다지 공정하지 않다는 평을 들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아주 균형잡히게 잘 쓰여진 책이라고 본다. 
Posted by Adella
난 그다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성적인 팬이었던 적은 없는데 (그의 소설들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그의 에세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예를 들면 재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즈 에세이'를 무척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은 재즈 에세이보다 더 즐겁게 읽은 것 같다. 아직은 초보지만 나도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도 했고, 또 초보자의 입장에서 숙련된 이의 경험담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다. 
재즈 에세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루키는 이 책에서도 달리기 그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처럼 달리기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최적의 소재가 아닌가 싶다. 몇 십 년간 마라톤에 매진해온 하루키는 감동적이고, 진지하고,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인생과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처음 빌렸을 때가 내가 막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고 이제 그 이후로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같이 달리기를 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초보 수준이지만 그 한 달 동안 나는 꽤 많은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고 달리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달리기가 힘들다 싶을 때면 이 책을 펴 들고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이 책은 이를테면 나에게 계속 달리기를 할 모티베이션을 제공한 셈이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보자면, 나는 하루키가 이렇게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그는 일 년에 한 번씩 마라톤에 참여하는데 이 책을 쓴 2006년까지 총 25번의 마라톤을 뛰었다. 몇 번인지 기억은 안나는데 그는 보스톤 마라톤을 몇 차례나 뛰었다. 보스톤 마라톤은 일정 시간 안에 달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데 나의 나이대와 성별의 사람들은 3:40:59 안에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1마일을 8분 25초 안에 뛰는 수준인데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지금 내 스피드는 대충 1마일을 11분~11분 30초에 뛰는 수준이다. (그것도 고작 5마일 뛰면서). 하루키 너무 존경스럽다;; 
그는 단 한번이긴 하지만 울트라 마라톤도 완주했고 트라이애슬론도 몇 차례나 완주했다. 그는 달리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소설가로서 계속 글을 쓰기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20년 넘는 기간을 꾸준히 달려왔다. 그는 울트라 마라톤에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를 위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것은 소설을 쓰는데 지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달리기를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계속 달리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부분에 무척이나 공감했다. 나도 지금 나와 함께 달리는 이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달리지도 못했을 거고 더 진지하게 달리기에 대해 고려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겨우 한 달에 불과하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맺은 인간관계와는 다른 편안함을 준다. 
나는 혼자서 일을 잘 처리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상담할 필요를 느낄 필요를 못 느끼는 그런 독립적인 인간은 아닌데 일상의 디테일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래서 별로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아니면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시시콜콜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 털어 놓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된 후 대학원에서 사귄 내 친구들은 그에 대해 꽤 실망을 한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만큼 자신들을 가깝게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미묘했던 순간에 나는 뭔가 변명을 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 이후에는 다시 그 일을 끄집어내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설명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난 원래 이런 인간이야, 라고 하지 않고 좀 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런건 조금 힘들다. 
그에 비해 달리기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좀 더 단순하다. 보통 많은 인간관계에 동반되는 미묘하고 복잡한 기류 같은 건 없다. 같이 만나서 달리고 달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피로감 없는 단순한 인간 관계는 인생의 활력소가 되어 준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내 이야기 반, 책 이야기 반이다. 요즘 쓰는 글들이 다 이렇다. 이 블로그 제목을 Journal로 잡은 건 애시당초 이렇게 일기 쓰듯이 글을 쓰려고 한 거긴 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계속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면 나도 하루키처럼 달리기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정말 영롱하게 빛나는 책이다. 이 책 덕분에 하루키의 다른 글도 읽고 싶어졌다.) 
Posted by Adella
대학 때 서양사를 복수전공 했는데 아무래도 서양사하면 유럽사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과의 교수들도 대부분 유럽사 전공자들이었다. 그 중에 미국사 전공하신 아주 훌륭한 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수업 스케쥴이 계속 안 맞아서 그 분이 강의하신 미국사 수업은 결국 듣지 못하고 졸업했다. 미국사 수업도 안들은 주제에 용감하게 졸업 논문 주제를 루즈벨트 대통령 시기의 노동법으로 정했는데 4학년 때는 여러가지로 좀 바빠서 제대로 준비도 못했다. 그리하여 논문 발표 때 미국사 전공하신 교수님께 혼나서 좀 부끄럽고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유럽사 쪽 관련 책도 안 읽은지 좀 오래 되서 자세한 건 이제 잘 기억도 안나지만 미국사 쪽은 정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하워드 진의 책을 읽은 정도가 다니까 미국 역사에 대한 지식은 매우 일천하다. 그래서 당분간 목표는 미국 역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처음 읽은 책이 What Hath God Wrought 였고 이번이 그 두 번째 책인 Battle Cry of Freedom 이다.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 특징은 내러티브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인데 그래서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힌다. 사실 글 쓰는 실력이 어느 경지에 오른 저자들의 책을 읽어 보면 소설책보다 역사책이 더 재미있는데 이 책도 그렇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전투 장면을 보면서, 정치적 상황의 변동을 보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자가 이렇게 긴장감 넘치게 전투, 정치, 외교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저자의 남북전쟁에 대한 시각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남부에게는 도덕적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 이끌어나갈 의지가 없어서 남부가 졌다, 라든지, 북부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감안하면 남부가 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라든지, 북부의 지도자들이 남부의 지도자들보다 리더십이 더 뛰어났다, 와 같은 설명을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북부의 승리는 전혀 필연적이지 않았다. 남북전쟁 시기동안 일어났던 사건들 중 한 가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더라도 남부는 독립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몇 가지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전투들의 경우가 그렇고 링컨이 재선에 실패하고 평화 협상을 주장했던 민주당이 대신 정권을 잡았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이렇게 하나 하나의 사건들이 중요했으니 전쟁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책에 대한 뉴욕 타임즈의 리뷰를 보면 남북전쟁은 미국사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시기라고 한다. 그럴만도 하구나, 싶은게 현재의 미국을 염두에 두고 이 남북전쟁 시기를 다룬 책을 읽으면 기분이 묘하다. 예를 들어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미국에서 가장 궁핍한 주 중 하나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남북전쟁 발발하기 이전부터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남부의 중요한 주 중 하나였다. 미 합중국에서 처음 분리를 선언하고 다른 주들을 선동한 것이 바로 사우스 캐롤라이나였다. 이 책의 후반부로 가면 'South Carolina must be destroyed'라는 챕터가 있는데 북부군이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들어갔을 때 많은 북부 병사들은 분리를 제일 먼저 주창한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전쟁의 막바지에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북부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것이 영구적으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웨스트 버지니아의 경우도 재미있다. 나는 항상 왜 웨스트 버지니아 주가 따로 있을까 궁금해 했는데 그 해답을 이 책을 통해서 얻었다. 남부주들이 분리 독립을 선언했을 때 남부주들의 선두주자 격인 버지니아 역시 분리 선언을 했는데 노예 소유주도 별로 없고 리치몬드와도 그리 가깝게 느끼지 않은 셰난도 계곡 근방의 사람들은 연방으로부터의 분리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북부의 지원을 받아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이름으로 연방에 다시 가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남부에 더 호의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남부군을 지원하게 된다. 지형지세를 이용해 남부군은 게릴라 작전을 펼치고 이에 호되게 당한 북부군은 이 지역을 아주 초토화시킨다. 원래 이 지역이 그렇게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러한 파괴 행위들이 현재의 빈곤한 웨스트 버지니아 경제에 상당 부분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 개별 주들 뿐만 아니라 남부 전체가 남북전쟁 이후 그 이전의 지위를 영원히 회복하지 못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남부의 경제는 몰락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은 북쪽에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비록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들의 가치관까지는 옹호하지 못하더라도 선조들이 남북전쟁에 참여했을 남부인들에게 남북전쟁은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발견한 책이 Confederates in the attic: dispatches from the unfinished civil war이라는 책이다. 차마 남부가 고향인 친구들한테 물어보긴 좀 민감한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비슷한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쓴 저자 덕에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도 다음에 읽을 책 리스트에 올라갔다. 
Posted by Adella
이전버튼 1 2 3 4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Adella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