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두껍지 않은 책이라서 금방 읽을 줄 알았더니 왠걸, 전혀 만만한 책이 아니라서 이제서야 다 읽었다. 난 민노씨가 이 책을 추천해주셨을 때 이 책이 에세이일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단편소설 모음집이었다. 7편의 단편소설 중 마음에 들었던건 삼십세(The Thirtieth Year), 모든 것(Everything), 그리고 빌더무트(A Wildermuth). 작품들은 모두 철학적이고 카프카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저자가 시인이기도 해서 그런지 글이 꽤 시적임. 아직 정리가 안되서 감상글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단편소설에 대한 감상을 쓰는게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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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della
언제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색하는 작가 테드창의 최신작 Exhalation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통찰력있는 단편 소설이다. 예전에 블로그에 테드 창의 What's expected of us를 번역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에디님이 그 소설이 결정론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틀린 유머라고 하셨는데 그 소설에서 테드 창이 간접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피력했다면 Exhalation에서 그는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Because even if a universe's lifespan is calculable, the variety of life that is generated within it is not. The buildings we have erected, the art and music and verse we have composed, the very lives we led: none of them could have been predicted, because none of them were inevitable.
...
Though I am long dead as you read this, I offer to you a valediction. Contemplate the marvel that is existence, and rejoice that you are able to do so. I feel I have the right to tell you this because, as I am inscribing these words, I am doing the same.

아 진짜 너무 감동적이다. 역시 테드 창 최고. 이 소설은 Eclipse two라는 단편소설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온라인에 공개해 놓았다. 관심있는 분은 여기로: http://www.nightshadebooks.com/downl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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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della
전에 읽었던 Au Bonheur des Dames와 함께 루공 마카르 총서에 속하는 책. 이 책은 파리 하층 노동계급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제르베즈는 동거인인 랑티에와 아들 둘과 함께 파리로 올라와 조그만 호텔방에서 산다. 그녀는 열심히 돈을 모아 자기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지만 무책임한 랑티에는 가져온 돈을 다 탕진하고 바람을 피워 집을 나가 버린다. 그 이후 열심히 일해 아들들과 소박한 삶을 꾸려나가던 제르베즈는 지붕 고치는 일을 하는 쿠포의 끈질긴 구애에 못이겨 그와 결혼을 한다. 술꾼이었던 아버지에게 질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은 근면한 쿠포와 제르베즈는 열심히 돈을 모은다. 그리하여 그녀의 소망은 거의 실현될 뻔 하였으나 쿠포가 사고로 지붕에서 떨어진 이후 모든 것은 변한다. 쿠포가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후 그녀의 삶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서서히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된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는 협소한 주거 공간, 남성 노동자들이 애용하는 주점,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 기계로 일이 대체되면서 임금 삭감을 겪는 노동자들의 불만과 불안, 알콜 중독과 가정 폭력, 노동계급의 결혼 예식, 노동계급의 정치 의식, 문화 생활, 알콜중독과 정신병원, 연애, 외도 등 이 책은 제르베즈의 삶을 따라 가면서 생생하게 파리 하층계급의 생활상을 그려낸다. 이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온갖 부도덕한 행동들이 묘사되지만 작가는 도덕적 판단은 배제한 채 이들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오류투성이지만 에밀 졸라가 그려내는 이들 등장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에밀 졸라의 걸작품으로 손꼽힐만한 책. 이 다음으로는 제르베즈의 아들 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나와 제르미날을 읽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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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상세보기

일제 시대 경성, 망하지도 죽지도 않고 사는 남자 이해명의 구질구질하고 판타스틱한 연애담. 경성의 땅부자인 아버지가 총독부에 땅을 자진 납부하고 총독부에 줄을 댄 덕에 총독부에 자리를 얻어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이해명은 도망간 여자 친구 조난실 -- 평범한 모던걸인 줄만 알았으니 알고 보니 과격파 독립운동가 -- 을 쫓다가 그녀가 살고 있는 세계를 엿보게 된다. 물론 이해명은 조난실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관심 없다. 그저 자신이 그녀를 용서해주기로 결심했는데도 자신을 자꾸만 내치는 조난실에게만 관심 있을 뿐. 그녀의 냉대 혹은 애원에도 불구하고 구질구질하게 그녀를 따라다니다가 길거리에서 그녀와 난투극까지 벌이는 이해명은 진짜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그녀가 원하는 남자가 되길 원하고 마지막에는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이 장면은 소설의 백미) 이 철없는 낭만주의자가 무시무시한 조난실의 세계의 히어로가 될 수 있을 리 있나. 약간의 반전이 가미된 채 이야기는 경쾌발랄하게 막을 내린다. 일제 시대와 같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해명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재치 넘치는 문장,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재미있고 톡톡 튀는 캐릭터들로 무장된 이 소설은 매우 매력적이다. 이로서 이지민은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Posted by Adella
그림자 자국 상세보기

출간된지 1년이 넘었는데 출간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워낙 오래전에 읽어서 드래곤 라자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도 안나는데 드래곤 라자의 후편이라고 하니 좀 걱정이 되었으나 이 책은 드래곤 라자와 별개의 독립적 작품으로 간주해도 무리는 없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예언자이다. 천 년에 한 명 나올만한 뛰어난 예언자인 그는 예언은 폭력이라고 믿고 (원치 않게 읽으려던 소설의 결말을 알게 되어버렸을 때를 생각해보라.) 예언하기를 거부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필코 숨겨야 할 비밀이 있는 드래곤들은 그가 예언하는 것을 막으려하고 전쟁에서 패한 바이서스 왕국의 왕비는 그의 예언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예언자는 결국 예언을 하고 드래곤들이 숨기려했던 비밀은 드러난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진다.

예언은 얼핏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정해진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예언은 결국 실현된다. 이러한 고대 신화적 주제를 이영도는 이 책에서 풀어낸다. 그리스 신화에서 무수히 증명되었듯 이 책에서도 인간은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 이들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오히려 의도와는 반대로 차근차근 예언을 실현해나갈 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모든 것은 결정된 것인가. 우리는 그저 운명의 꼭두각시일 뿐인가. 왕지네는 묻는다. "피할 수 없었어? 바꿀 수 없었어? 모든 건 다 결정되어 있는 거야?" 그 질문에 대해 예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왕비는 왕의 죽음 때문에 슬퍼서 죽은 것이 아니야. 시간의 장인들은 통속적이야.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지. 그건 가지치기인지도 몰라. 적당히 솎아주지 않으면 과일이 너무 많이 열려서 나무에 해가 가지." 모든 디테일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시간의 장인'들이 큰 이야기 흐름에만 관심 있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가지치기 정도 수준의 관심만 가지고 있다면, 순간순간의 인간의 선택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예언자와 달리 인간은 미래를 모른다. 이루릴은 말한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에요. 펫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루릴은 선택한다. '어느 쪽을?' 왕비를 막기보다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아일페사스를 구하는 쪽을.

존재를 지워버리는 그림자 지우개의 위력은 가공할만하지만 그림자 지우개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할 것 같다. 프로타이스가 돌아오려고 하는 바람에 그림자 지우개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그 때마다 다른 사건이 전개된다. 한 존재의 유무는 무의미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든 '시간의 장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예언과 왕자는 남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어떤 존재의 유무에 따라 이야기의 진행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미래는 여전히 오픈북인 셈이다.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바꿀 수 없었던 예언자지만 그도 '시간의 장인'들이 안배해놓은 것, 예언과 왕자, 이외에 한가지를 더 남겨두고 사라진다. 존재는 사라지지만 그의 부탁은 남고 인간은 드래곤 레이디가 정해놓은 무시무시한 운명을 비켜나갈 수 있게 된다. 이 결말은 꽤 감동적이었다.

인터넷에서 이 책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황금가지에서 편집과정에서 삭제한 부분을 공개해 놓았다. (여기) 전체적으로는 삭제한 것이 나은데 어떤 부분은 삭제하지 않았으면 이야기가 더 명료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었다. (평행우주를 만들어버리는 그림자 지우개 덕택에 후반부의 이야기는 잘 따라가지 않으면 꽤 혼란스럽다.) 이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책 앞부분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일러두기를 유념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이영도의 글솜씨는 원숙해지고 그래서 독자는 그저 즐겁고 행복할 따름이다.

(오랜만에 이영도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2009년도에 나온 에소릴의 드래곤이라는 단편 소설도 발견했는데 경쾌하고 발랄한게 그의 작품답다.)

Posted by Ad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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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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